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정권 (문단 편집) === 1940년 : 정부 수립, [[괴뢰국|그러나 제한된 주권]]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왕징웨이 정권 취임식에서 맹세를 낭독하는 왕징웨이.jpg|width=100%]]}}}|| || 왕징웨이 정권 취임식에서 맹세를 낭독하는 왕징웨이 ||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는 난징에서 국민정부 [[환도#s-3]] 의식[* 왕징웨이는 국민정부의 정통성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난징에서 충칭으로 피난갔던 국민정부가 다시 난징으로 돌아왔다'라는 의미에서 환도 의식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일본과 항전하고 있던 기존 충칭의 국민정부는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상황이었다.]과 화평건국 10대 정강을 발표하며 [[오권분립|오원]]의 원장, 국민당의 각 당사를 재설치하고 전쟁 전의 모든 체계를 회복한 후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상술한 일본군의 비협조와 여러 제약으로 왕징웨이 정권이 직접 통치할 수 있는 영역은 [[장쑤성]], [[안후이성]], [[저장성]] 북부에 그쳤다. 명목상 왕징웨이 정권은 입법원과 행정원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 권한은 일본과 일본 중지나방면군에게 있었으며 심지어 난징 바로 옆의 상하이조차 신문기사에 왕징웨이 정권을 놓고 "'''Puppet'''(괴뢰) Regime"이라고 칭함으로서 처음부터 괴뢰 정권이라고 깠다. 물론 이는 [[치외법권]]을 적용받는 [[상하이 조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https://cafe.naver.com/booheong/179267|#]] 왕징웨이 정권은 명목상 수도는 난징이었으나 [[난징대학살|난징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으로 난징은 아직 재건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1941년까지는 상하이가 사실상 수도로 기능하였다.[* 이는 [[중화민국 유신정부]] 시기에도 마찬가지여서, 국가적 행사가 있는 날에는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잠깐 난징에 방문하여 행사를 진행한 후 행사가 끝나면 곧바로 기차를 타고 상하이로 돌아가 버리는 일도 많았다.] 왕징웨이는 기존 국민정부를 계승하였다는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충칭에 있는 국민정부 주석 [[린썬]]을 왕징웨이 정권의 주석으로 인정하고 린썬에게 난징으로 돌아오라며 러브콜을 보냈으나 린썬은 당연히 거부했다. 그리하여 왕징웨이는 주석 대행 자리에 앉아 [[행정원장]]과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을 겸임하여 왕징웨이 정권을 통치하였다. [[저우포하이]]는 통화를 일원화하여 일본의 경제 지배를 바꿔 보려는 요량으로 새로운 중앙은행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계획에 부정적이었지만, 저우포하이는 중앙은행을 설립하지 못하면 사직까지 할 결심으로 밀어붙여 결국 1940년 5월 3일 개최된 1차 중앙은행위원회에서 새 중앙은행의 이름을 중앙저비은행(中央儲備銀行)으로 정하였고, 1940년 11월 30일 중일기본조약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음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일본인 고문이 실권을 차지하고 있었고, 사실상 따로 놀던 화북위원회는 은행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저우포하이는 "그러한 괴뢰은행이라면 만들지 않는 편이 낫겠다."며 분노했다. 왕징웨이는 일본과의 화친이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일본 내에서의 파벌은 국민당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지독했다. 결국 여러번의 혼란과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무책임함이 더해져 정권 수립은 매우 어렵게 진행되었다. 왕징웨이 정권은 3월에 수립되었음에도 [[동 공작]]이 실패로 끝난 1940년 11월 30일에야 일본 제국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K25eCwLdvmE)]}}}|| || 1940년 중일기본조약에 서명한 후 연설하는 왕징웨이[br]왕징웨이는 양국이 조약을 체결하여 선린우호, 공동방공, 항구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연설했다. || 뒷날 역사가들의 분석에 따라 그가 일본군과 화친하려고 한 이유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번째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족을 배반했다는 민족 배반론([[한간]]론), 충동적인 성격으로 판단을 그르쳤다는 실수론, 일본과의 전쟁으로 민간인들이 고통받는 것을 볼 수 없었다는 [[고육지책]](자기 희생)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자기 희생론 등이 제시된다. 이 중 단순히 어느 한 쪽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려우며 왕징웨이가 여러 번 권력 투쟁과 냉철한 국제 정세로 인하여 좌절하게 되면서 그의 민족주의가 변질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대개 비판론이든 희생론이든 각자의 주장을 어느 정도 반영하며 실수론은 비판론이나 희생론에서도 상당히 인용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